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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오해

뒷마당 풀밭에 사슴 한 마리 서 있다. 그에게 살금살금 접근해서 정면으로 시선을 교환한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사슴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생후 몇 달 안 되는 손녀딸을 팔에 안는다. 그녀는 아주 차분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살핀다. 이 아이는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토끼와 호랑이가 동화에서 말을 주고받는다. 동화작가는 의인화(擬人化) 기법으로 동물을 사람으로 둔갑시킨다. 말은 생각을 전제로 하는 법. 당신의 손짓 발짓, 웃거나 찌푸리는 얼굴, 짧은 탄성 같은 것들은 비언어(非言語)적인 도우미 역할을 할 뿐 세련된 ‘마스터 오브 세리머니’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   아이가 어른처럼 언어를 사용해서 생각한다는 설정을 성인화(成人化)라 한다. 나는 사슴도 손녀딸도 언어를 훌륭하게 구사하는 성인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들이 나와 같은 수준의 소통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에 마음껏 빠진다.   사슴이 이러저러한 생각을 했다는 둥, 손녀딸이 여차여차한 생각을 했다는 둥, 하며 내가 둘러댄다면 그건 이해가 아닌 오해다. 오해가 지나치면 곡해가 일어나지. 상대방 마음을 제멋대로 구부리고 비틀어대는 사태가 터진다.   만약에, 내가 사슴에게 “너는 내가 무슨 맛있는 음식이라도 줬으면, 하는 생각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구나”라고 말한다면? 손녀딸에게 “너는 할아버지가 많이 늙었네, 하는 측은한 생각에서 내 얼굴을 살피는구나”라고 말한다면? 그런다면, 나와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단순한 대답이 나온다. - 나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속 일을 말로 옮기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표현능력이 없으니까 상대방의 오해를 바로잡아주는 친절이나 정열 또한 있을 수 없다. 말을 할 줄 알아야 생각을 말할 수 있지. ‘말=생각’이다. 이 등식이 정교하지 않게 들리더라도 당신은 양해해 주기를 바란다.   ‘thought, 생각’은 ‘think, 생각하다’라는 동사의 과거형이면서 명사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서구인의 생각은 현재형이 아니라 이미 터진 일, 엎질러진 물 같은 거다. 그래서인지 ‘think’의 고대영어 ‘thinken’에는 생각한다는 뜻 외에 ‘remember, 기억하다’라는 뜻이 있었다. 우리말로도 ‘고향생각’, 하면 고향에 대한 ‘메모리’를 뜻한다. 참 오랜만에 영어와 우리말 어원이 같은 사고방식에서 오는 것을 찾아내서 기쁘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고대영어 ‘thinken’에는 또 상상하다, 배려하다, 의도하다, 소망하다, 느끼다 라는 뜻이 있었는데 우리말 ‘생각하다’에도 똑같은 뜻이 고스란히 포함돼 있다. 짧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상상-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배려-야, 남 생각도 좀 해라! ▶의도-나도 그럴 생각이야. ▶소망-생각 있어? ▶느낌-쓸쓸한 생각. (표준국어대사전)   사슴이며 손녀딸을 생각한다. 사슴은 비 내리는 늦가을 밤 어디에 숨어있는가. 어느새 발랄한 소녀가 되어서 간드러진 목청으로 노래를 기똥차게 잘 부르는 손녀딸은 어떤 마음으로 학교공부를 하며 지내는지.   그들이 지금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상상한다. 틀린 상상, 틀린 생각을 무턱대고 한다. 무념무상의 늪에서 벗어나서 오해라도 해볼까 하는 마음이다. 백지 답안지보다 틀린 답을 써넣겠다는 속셈. 빵점보다 몇십 점이라도 받고 싶다. 그런 노력이 없는 삶은 호되게 재미없는 삶이라 생각한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오해 thought 생각 상대방 마음 우리말 어원

2024-11-26

[잠망경] 인사이드 잡

병동에 환청 증세가 있는 환자들이 많다. 그들은 대체로 환청에 대하여 내게 소상하게 말하지 않는다.   50대 중반의 필립이 다른 병동에서 내 병동으로 꽤 오래 전에 후송돼 온 이유는 그곳 정신과 의사에게, “Stay away from me! 가까이 오지 마!” 하며 복도에서 음산하게 말하고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 속 마음을 남에게 쉽사리 털어 놓는 성격이 아니다. 내가 얘기를 하자 하면 낮은 목소리로 거부한다.   필립이 외로운 자세로 병동을 걸어간다. 뒷짐을 지는가 하면 양손을 위로 올리며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무슨 시그널을 보내는 동작을 취하기도 한다. 다른 환자들은 기이한 행동을 하는 그를 회피하려는 눈치다.   그가 내 오피스 앞을 지나가며, “You don‘t understand, do you? 이해를 못하지요, 합니까?”라고 한 후 다른 말을 계속하면서 간호사실 쪽으로 걸어간다. 좀 괴로워하는 얼굴 표정의 그는 옛날에 유명 자동차 회사 간부급으로 일한 전력이 있다.   그룹테러피 시간. ‘internal stimulus, 내적자극(內的刺戟)’에 대하여 얘기하겠다고 환자들에게 토픽을 소개한다. 누구나 ‘외부적 자극’을 통하여 느끼는 감각은 뚜렷하지만, 주야장천 무엇인가 느끼는 우리의 ‘내부적 자극’은 잘 알지 못한다는 서론을 펼친다.   ‘internal stimulus’가 ‘inside stimulus’로 말이 바뀐다. 그리고 ‘inside stimulus’가 ‘inside job’으로 또 바뀐다. ‘인사이드 잡’은 범죄영화에 자주 나오는 슬랭으로서 ‘내부자 범행’를 뜻한다. 필립이 몰래 웃는다. 어쩌다 내적자극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이런 슬랭으로 전락했는가.   ‘인사이드 잡’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feeling, anxiety, fear, anger, wish, love, desire - 느낌, 불안, 공포, 분노, 소망, 사랑, 욕망’, 등등이 있단다. ‘평화’는? 누가 ‘Peace is boring, 평화는 따분합니다’ 하고 일갈한다. 좋아, 그러면, ‘생각’은?“Are thoughts inside jobs? 생각도 인사이드 잡이냐? ” 한두 명이 고개를 끄덕인다. 생각은 어디에서 오느냐. “Thought is coming from mind! 생각은 마음에서 옵니다!”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나지.   ‘thought, 생각’은 ‘think, 생각하다’의 과거형과 같은 말이다. 동사의 결과가 명사다. 생물체는 우선 먼저 행동하고 본다. ‘think’는 고대영어에서 ‘기억하다, 상상하다, 의도하다, 욕망하다’라는 의미였고 전인도 유럽어로는 ‘느끼다, 고마워하다’라는 뜻이었다. 다 얼추 어슷비슷하게 들리지 않는가.   ‘mind, 마음’은 고대 영어로 ‘기억, 목적, 의식, 지능, 지성’이라는 의미였다. 14세기에 ‘out of one’s mind, 미치다, 실성(失性)하다’라는 관용어가 생겨났다. 생각이 마음을 벗어나면 실성하는 법. 마음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서 튼튼하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보다 마음에 매달리는지도 모른다. 그 반대일 수도 있다고?   필립은 환청증세를 다스리는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환청을 내부적 상황이 아닌 외부상황으로 생각하면 마음이 약해진다. 꿈을 꾸면서, 꿈이라는 환상을 현실로 받아드리는 생각에 반응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당신과 나의 내적자극은 대충 ’인사이드 잡‘인 것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인사이드 inside stimulus thought 생각 internal stimulus

2023-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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